한국과 일본의 무역협상 결과 비교 분석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수십 년간 이어진 양국의 경제 관계는 협력과 경쟁, 갈등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특히 무역 협상의 역사는 양국 관계의 기류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바로미터와 같았다. 2000년대 초 뜨거웠던 자유무역협정(FTA) 논의부터 2019년의 서늘했던 수출 규제 사태, 그리고 다자 체제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일 무역 협상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양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복잡한 지정학적 셈법과 미래를 향한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 엇갈린 20년: 한일 무역 협상의 역사적 궤적
2000년대 초, FTA의 꿈과 좌절
21세기의 문을 연 2000년대 초, 한일 양국은 새로운 경제적 파트너십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다. 1998년부터 민간 차원의 공동 연구로 시작된 양국 간 FTA 논의는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 간 협상으로 격상되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의 FTA를 통해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공산품과 농산품의 일본 시장 진출 확대를 꾀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는 중소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목표와도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한국의 부담과 핵심 부품·소재 시장 잠식에 대한 우려, 그리고 일본 측의 소극적인 태도가 맞물리면서 6차례의 협상 끝에 2004년 말 협상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국가기록원의 자료는 당시 양국이 민감한 분야도 배제하지 않는 '포괄적 FTA' 원칙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2019년, 갈등의 정점: 수출 규제 사태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양국의 무역 갈등은 2019년 7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폭발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대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배제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안보상의 이유'와 '한국의 수출 관리 미흡'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국내외에서는 이를 명백한 정치적 보복 조치로 해석했다. 이 사건은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외교적 갈등이 무역 관계를 얼마나 쉽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한국 정부는 즉각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며 맞섰고, 양국 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이 갈등은 2023년 3월, 일본이 수출 규제를 해제하고 한국이 WTO 제소를 취하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양국 경제계에 깊은 상처와 교훈을 남겼다.
2. 양자에서 다자로: RCEP, 새로운 게임의 법칙
RCEP, 최초의 한일 FTA 효과?
양자 협상이 좌초되고 갈등이 깊어지는 동안,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무역 지형은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2022년 2월 한국에서 발효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은 한일 양국이 최초로 함께 참여하는 다자간 무역협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RCEP을 통해 한일 양국은 사실상 첫 FTA를 맺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한일 양국의 상호 관세 철폐율은 품목 수 기준 83% 수준으로, 기존의 다른 FTA에 비해 개방 수준이 높지는 않다. 자동차, 기계 등 민감 품목은 상당수 양허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통일된 원산지 규정 도입으로 역내 공급망 활용이 용이해지고, 중간재 교역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이는 양국 간의 직접적인 시장 개방 효과보다는 아시아 전체의 생산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음을 시사한다.
CPTPP와 한중일 FTA: 미완의 퍼즐
RCEP이 현실화된 협력의 틀이라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한중일 FTA'는 여전히 미래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미완의 퍼즐이다. 일본은 CPTPP의 주도국으로서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과 무역 규범을 통해 역내 경제 질서를 이끌고 있다. 한국 역시 CPTPP 가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농수산업계의 반발과 복잡한 국내외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12년부터 논의되었으나 지지부진했던 한중일 FTA는 최근 글로벌 공급망 위기와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 다시금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 전문가는 한일 FTA와 CPTPP 가입을 병행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이는 양자 협력과 다자 협력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한일 양국은 RCEP이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CPTPP와 한중일 FTA라는 각기 다른 셈법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복잡한 게임을 이어가고 있다.
3. 숫자가 말해주는 진실: 무역 지형의 변화
수출 규제 그 이후: '탈일본'과 공급망 재편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한국 경제에 위기였지만, 동시에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의 자립을 위한 강력한 촉매제가 되었다. 정부와 기업은 핵심 품목의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화수소 등 일부 품목의 대일 의존도는 눈에 띄게 감소했으며, 공급망 안정성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종연구소의 보고서는 정부와 민관의 합동 노력으로 3대 품목의 공급망 안정화를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2025년에는 5년간의 노력 끝에 공작기계의 '두뇌'로 불리는 CNC(컴퓨터 수치 제어) 장치의 국산화에 성공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이는 역설적으로 외부 충격이 한국 산업의 체질 개선과 기술 자립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산업별 명암: 반도체와 자동차
한일 무역 관계의 변화는 특정 산업에 더욱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반도체 산업은 2019년 수출 규제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었지만, 한국 기업들은 빠른 공급망 재편과 기술 개발로 위기를 극복해냈다. 세계은행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의 수출 통제는 특히 불화수소의 대한국 수출을 크게 감소시켰으나,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생산 차질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자동차 산업은 또 다른 차원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최근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 대해 자동차를 포함한 수입품에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 자동차 업계는 공동의 위기에 처했다. 이는 개별적인 양자 협상을 넘어, 글로벌 보호무역주의라는 거대한 파도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거시 경제 지표의 변화: GDP와 교역량 추이
지난 20년간 한일 양국의 경제적 위상은 크게 변화했다. 과거 한국의 주요 무역 상대국이었던 일본의 비중은 점차 감소하고, 그 자리를 중국이 차지했다. 국가지표체계에 따르면, 한국의 수출 상대국 중 중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진 반면, 미국과 일본의 비중은 감소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이러한 무역 구조의 변화는 양국 관계의 상호 의존도가 과거에 비해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경제적 지표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2024년, 한국의 1인당 명목 GDP가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현실화되었다. 물론 이는 환율 효과와 양국의 경제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양국 간 경제적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4. 협상 테이블 너머: 지정학과 미래 협력의 향방
미중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한일의 전략적 선택
오늘날 한일 무역 관계는 단순히 양국 간의 문제를 넘어,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산업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동맹국 중심의 공급망(일명 '프렌드쇼어링')을 구축하려 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은 이 전략의 핵심 파트너다. 이러한 구도는 양국에게 새로운 협력의 기회를 제공한다. 과거 경쟁 관계에 있던 분야에서도 공동의 위협에 맞서 협력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최근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동시에 관세 압박을 가하는 상황은, 양국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공동의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결국, 한일 무역의 미래는 양자 협상을 넘어 한미일 3각 공조의 틀 안에서 그 방향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2025년, 국교 정상화 60주년: 협력의 모멘텀은?
202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다. 2019년의 극심한 갈등을 지나, 최근 양국 관계는 다시금 협력의 분위기를 찾아가고 있다. 2025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제57회 한일경제인회의에서는 '더 넓고 더 깊은 한일 협력'을 주제로 인공지능, 반도체, 공급망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의 협력 강화 방안이 논의되었다. 또한, 한국무역협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양국 기업의 90% 이상이 향후 파트너 기업과의 협력을 확대·유지할 의향이 있다고 답해, 정치적 부침과 별개로 경제 현장에서는 상호 신뢰와 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고함을 보여주었다. 과거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일 FTA 협상보다는, 이제는 소부장, 첨단 기술, 제3국 공동 진출 등 구체적이고 실리적인 분야에서 협력 모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한일 무역 관계의 새로운 방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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