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 한국 산업계에 던져진 거대한 질문
1. 서론: '최악'은 피했지만, '최선'이라 말할 수 있을까?
2025년 7월 31일, 숨 가쁘게 진행되던 한-미 관세 협상이 마침내 타결되었습니다. 8월 1일부터 예고되었던 25%의 상호관세 폭탄은 15%로 낮춰졌고, 우리 경제의 대동맥인 수출길에 드리웠던 짙은 안개는 한 꺼풀 걷혔습니다.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제거됐다"고 평가하며 안도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복잡 미묘합니다. 과연 이번 협상은 한국 산업계에 승전보였을까요, 아니면 더 큰 숙제를 안겨준 상처뿐인 영광이었을까요? 이 글은 단순한 손익계산을 넘어, 이번 관세 협상이 한국의 주요 산업 지형을 어떻게 바꾸고, 우리 기업들이 어떤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합니다.
2. 자동차 산업: FTA 특혜의 종말, 무한 경쟁의 서막
이번 협상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맞은 곳은 단연 자동차 산업입니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제 아래 누려왔던 '무관세'라는 강력한 무기가 사라지고, 일본, 유럽연합(EU)과 동일한 15% 관세의 출발선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세율 변화를 넘어, 지난 10여 년간 유지해 온 대미 수출 전략의 근간이 흔들렸음을 의미합니다.
단기적 충격: 가격 경쟁력 약화와 주가 하락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국내 완성차 업체의 주가가 급락한 것은 시장의 우려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기존에 2.5% 관세를 내던 일본·EU와 달리 무관세였던 한국은 관세 인상 폭(15%p)이 경쟁국(12.5%p)보다 커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에서 불리해졌습니다. 이는 곧바로 소비자 가격 인상 압박으로 이어지거나, 수익성을 희생하며 가격을 유지해야 하는 딜레마를 안깁니다. 단기적으로는 대미 수출량 감소와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해 보입니다.
중장기 전략: '메이드 인 USA' 가속화와 공급망 재편
이제 한국 자동차 산업의 활로는 미국 현지 생산 확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대응을 위해 조지아주 등에 전기차 공장을 건설 중인 현대차그룹은 이번 협상을 계기로 현지 생산 비중을 더욱 공격적으로 늘릴 것입니다. 이는 관세 장벽을 우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중장기적으로는 핵심 부품사들의 동반 진출을 포함한 공급망 전체의 '미국 중심 재편'이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는 국내 고용 및 투자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글로벌 통상 환경의 구조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3. 전자 및 반도체 산업: 안도의 한숨 속 '미래 청구서'
반도체 업계는 일단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다는 점에서 안도하는 분위기입니다. 상호관세가 15%로 낮아졌고, 향후 미국이 반도체에 별도의 품목관세를 부과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기로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해소했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단기적 안정: 불확실성 해소와 '최혜국 대우' 확보
당장 우려했던 25% 관세가 현실화되지 않으면서 단기적인 수출 타격은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미국 내 반도체 수요에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점은 긍정적입니다. 이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반도체 강자들이 글로벌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장기적 과제: 미국 중심 공급망 재편과 기술 주권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이번 협상의 대가로 약속한 대규모 대미 투자 펀드에는 반도체 분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결국 미국 내 생산시설 확대를 의미하며, 미국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의 보조금과 맞물려 기술 유출이나 R&D의 미국 이전 등 장기적인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안보'를 명분으로 한 미국의 요구는 더욱 거세질 것이며, 우리 기업들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에 깊숙이 편입되는 과정에서 기술 주권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4. 철강 및 금속 산업: 협상 테이블에서 외면당한 '아픈 손가락'
이번 협상에서 철강업계는 사실상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자동차 관세는 인하되었지만, 철강·알루미늄에 부과되던 50%의 살인적인 관세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미국 상무장관은 SNS를 통해 철강 관세는 "합의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변동이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경제적 타격: 50% 관세 장벽과 경쟁국 대비 불리한 조건
50% 관세는 사실상 대미 수출길을 막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미 국내 철강사들은 고율 관세 여파로 대미 수출이 급감하며 실적에 큰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더욱 뼈아픈 점은 경쟁국과의 형평성입니다. 일본은 US스틸 인수를 통해 미국 내 생산기지를 확보하며 관세를 우회할 길을 열었고, EU는 일정 물량에 관세를 면제받는 쿼터제에 합의했습니다. 한국만 아무런 보호막 없이 고율 관세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생존 전략: 고부가가치화, 시장 다변화, 그리고 정책적 지원
철강업계의 대응은 처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수출 감소를 감내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미국 시장 의존도를 줄이고 동남아, 인도 등 신시장 개척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동시에 친환경·고부가가치 철강 기술 개발로 차별화를 꾀해야 합니다. 하지만 업계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여야가 초당적으로 'K-스틸법' 제정을 추진하는 등, 위기에 처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인 정책 지원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5. 화학 및 석유화학 산업: 안개 속 한 줄기 빛, 그러나 갈 길은 멀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경기 둔화로 이중고를 겪던 화학 및 석유화학 업계는 이번 협상으로 일단 급한 불은 껐습니다. 25% 관세가 15%로 인하되면서 최악의 상황은 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산업의 근본적인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한상의의 기업경기전망지수(BSI) 조사에서 석유화학 분야는 여전히 부정적 전망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관세 부담 완화는 분명 긍정적 신호지만, 산업 구조 재편과 글로벌 수요 회복이라는 더 큰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기업들은 원가 경쟁력 확보와 함께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화학 제품으로의 전환을 더욱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6. 섬유 및 의류 산업: 생산기지 다변화로 활로 모색
섬유·의류 산업 역시 관세 인상으로 인한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산업의 대응 전략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많은 OEM 기업들이 베트남, 과테말라 등 해외 생산기지를 다변화하고 있으며, 미·중 무역 갈등 속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미국의 움직임을 기회로 삼아 대체 공급처로서의 입지를 다지려 하고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관세 부담으로 인한 가격 협상에 어려움을 겪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술력을 앞세운 기능성 원단 등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하고, FTA 체결국 중심의 생산 구조를 재편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7. 기타 산업에 미친 영향
농업계: '빗장 수비'의 성공, 그러나 안심은 이르다
이번 협상에서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농업 분야의 '선방'입니다. 대통령실은 미국의 강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국내 쌀과 쇠고기 시장을 추가 개방하지 않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식량 안보와 농민들의 생존권이 걸린 민감한 사안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통상 압박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관세가 아닌 농산물 위생·검역(SPS) 기준 완화 등 비관세 장벽을 통한 미국의 시장 개방 요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므로, 지속적인 대응 전략 마련이 필요합니다.
건설업: 대미 투자 펀드 속 숨겨진 기회와 리스크
건설업은 관세 협상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간접적인 파급 효과는 상당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약속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협력 펀드는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특히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협력 펀드는 미국 내 조선소 현대화 및 신설 프로젝트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국내 건설사들의 플랜트 및 인프라 수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이미 미국은 한국 건설사들의 주요 수주 시장 중 하나입니다. 다만, 글로벌 무역 환경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환율 변동과 원자재 가격 상승은 잠재적인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8. 결론: 새로운 통상 시대, 한국 산업의 나아갈 길
이번 한-미 관세 협상은 우리에게 한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동시에 알리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대표되던 '규칙 기반의 자유무역' 시대는 저물고, 국익과 안보 논리가 앞서는 '전략적 관리무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자동차 산업은 FTA 특혜 상실이라는 아픔을 겪었고, 철강은 고율 관세의 멍에를 벗지 못했습니다. 반면, 반도체는 불확실성을 덜어냈고, 조선은 새로운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처럼 산업별로 희비가 엇갈린 결과는 이번 협상이 단순한 '제로섬 게임'이 아닌,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빅딜'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한국 산업계는 더 이상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기업들은 관세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초격차 기술력을 확보하고, 특정 국가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정부는 피해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변화하는 통상 질서 속에서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교한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합니다. 거대한 파도 앞에 선 한국 경제, 이제 생존을 넘어 미래를 향한 담대한 항해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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