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세 재협상, '트럼프 나비효과' 속 기회인가 위기인가?

한일 관세 재협상, '트럼프 나비효과' 속 기회인가 위기인가?

한일 관세 재협상, '트럼프 나비효과' 속 기회인가 위기인가?

작성일: 2025년 8월 7일

2025년 여름, 글로벌 통상 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한국, 일본과 연이어 '15% 상호관세'라는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세계는 새로운 무역 질서의 서막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은 3,500억 달러, 일본은 5,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대미 투자를 약속하며 일단 급한 불을 껐다. 하지만 이 거대한 파도는 이제 막 가장 가깝고도 먼 이웃, 한일 관계로 밀려오고 있다. 20년 넘게 멈춰 있던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의 시계는 과연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라는 거대한 태풍 속에서 한일 관세 재협상은 양국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인가.

과거의 그림자: 멈춰버린 한일 FTA 시계

한일 양국의 현대 경제 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후 양국은 지리적 인접성과 산업 구조의 상호보완성을 바탕으로 교역을 폭발적으로 늘려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만성적인 대일 무역적자라는 풀기 힘든 숙제가 항상 존재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 협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양국은 2003년 12월 야심 차게 FTA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는 2005년 타결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협상은 1년 만인 2004년 11월, 6차 협상을 끝으로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원인은 명확했다. 일본의 농산물 시장과 한국의 공산품 시장, 특히 부품·소재 분야의 개방 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입장 차가 너무도 컸다. 일본은 자국의 텃밭인 농업 시장을 지키려 했고, 한국은 기술 경쟁력이 높은 일본 제품의 공세로부터 국내 제조업 기반을 보호해야 했다. 이 근본적인 딜레마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2019년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 사태처럼, 정치·외교적 갈등이 언제든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까지 더해졌다. 한일 관세 재협상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이 멈춰버린 시계가 남긴 과거의 그림자를 직시해야만 한다.

정치의 계절: 관계 개선과 지정학적 셈법

해빙 무드와 과거사라는 변수

최근 한일 관계는 분명 변화의 기류를 맞고 있다. 양국 정상 간의 셔틀 외교가 복원되고, 경제 안보 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등 긍정적인 신호가 이어지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과거사 문제 해결보다는 미래지향적 협력을 우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추세다. 이는 미중 전략 경쟁 심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양국이 더 이상 소모적인 갈등을 지속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수십 년간 양국 관계를 얽어매 온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잠재적 '뇌관'이다.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경제 협력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은 협상의 가장 큰 불확실성으로 남아있다.

미국의 '15% 관세'가 만든 새로운 판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는 역설적으로 한일 양국에 새로운 협력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 양국에 동일하게 '15% 상호관세'라는 기준점을 제시한 것은 매우 중요한 변수다. 과거 한미 FTA 덕분에 한국 자동차는 미국 시장에서 일본 차에 비해 2.5%의 관세 우위를 누렸지만, 이제 그 혜택은 사라졌다. 독일, 일본과 같은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이다. 이는 양국 자동차 산업에겐 위기일 수 있지만, 통상 협상가들에겐 새로운 판을 짤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이라는 공동의 변수 앞에서 양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이 주도하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전략적 가치도 더욱 부각될 수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맞서는 다자 무역체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한국의 CPTPP 가입과 한일 FTA가 연계되어 논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숫자가 말하는 현실: 득과 실의 저울질

재협상의 핵심 쟁점: 무엇이 다른가?

만약 한일 FTA 협상 테이블이 다시 차려진다면, 쟁점은 과거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를 것이다. 여전히 일본의 첨단 부품·소재·기계와 한국의 농수산물 및 일부 소비재 시장 개방이 핵심 의제가 될 것이다. 한국은 부품·소재 산업의 시장 잠식을 우려하고, 일본은 농업계의 반발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2019년 수출 규제 사태 이후 한국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자립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은 새로운 변수다. 과거만큼 일방적으로 불리한 구도는 아닐 수 있다는 자신감이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 또한, K-콘텐츠, 화장품 등 일본 시장을 공략할 새로운 수출 동력이 생겨난 점도 긍정적이다.

"한일 FTA는 부품/소재, 철강 등 제조업에 부담을 주지만, 화장품, 콘텐츠 등 소비재 산업에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 KB증권 리포트

관세 변화의 나비효과: 산업별 명암

관세 철폐는 산업별로 명암을 극명하게 가를 것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는 일본산 고품질 소재·부품을 더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어 원가 경쟁력에 숨통이 트일 수 있다. 화장품, 식품, 콘텐츠 산업은 한류를 등에 업고 거대한 일본 내수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기회를 잡게 된다. 반면, 자동차 부품, 정밀화학, 기계 등 일본과 직접 경쟁하는 국내 산업들은 힘겨운 싸움에 내몰릴 수 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은 가장 복잡한 방정식에 놓인다. 미국 시장에서의 관세 조건이 동일해진 상황에서, 한일 양국 시장의 문이 열리면 글로벌 생산 및 판매 전략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수도 있다. 이는 완성차 업체뿐 아니라 수많은 협력업체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미래를 향한 제언: 전략적 선택의 기로에서

시나리오 분석: 최선, 차선, 그리고 최악

앞으로의 전개는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상해볼 수 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양국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고,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를 체결하는 것이다. 이는 양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불안정한 동아시아 정세에 안정성을 더하는 '윈-윈' 게임이 될 것이다. 차선책은 CPTPP 가입을 우선 추진하며 다자 틀 안에서 점진적으로 협력 수준을 높여가거나, 민감한 분야를 제외한 제한적인 범위의 FTA를 먼저 체결하는 방식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협상 재개 논의가 또다시 국내 정치나 과거사 문제에 발목 잡혀 좌초되는 경우다. 이는 양국 모두 글로벌 보호무역주의의 파고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됨을 의미한다.

한국의 대응 전략: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나침반

이제 한국은 과거의 프레임을 넘어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나침반으로 한일 관계를 조망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관세를 낮춰 수출을 늘리는 차원을 넘어, 안정적이고 회복력 있는 공급망을 구축하고, 핵심 기술을 보호하며, 지정학적 리스크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역시 경제안보를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양국의 새로운 협력 공간이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투트랙 전략이다. 한일 양자 FTA와 CPTPP 가입을 동시에, 그러나 상호보완적으로 추진하며 협상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둘째, 산업 경쟁력 강화다. 2019년의 교훈을 잊지 말고, 협상 결과와 무관하게 '소부장'을 비롯한 핵심 산업의 자립도를 높이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보험이자, 협상력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지렛대다. 셋째, 정교한 여론 관리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다. FTA의 득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피해가 예상되는 산업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소모적인 국론 분열을 막아야 한다.

한일 관세 재협상은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격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양국이 어떤 미래를 함께 그려나갈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거의 갈등에 발목 잡힐 것인가, 아니면 경제안보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을 것인가. 이제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대담한 전략적 선택이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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